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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필리핀 이모님’들의 불안한 미래 등록일 2023.11.23 10:15
글쓴이 한길 조회 66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판결문도 쓰는, 똑똑한 인공지능(AI)이 대체하기 어려운 인간 노동은 무엇일까. 최근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인공지능 노출도’를 따져봤더니, 이발·미용사와 보육·가사노동자, 소방관, 배관공 등은 상대적으로 인공지능에 덜 노출된 직업으로 분석됐다. 반면 대학 교육이나 분석 기술이 필요할수록, 고임금을 받는 직업일수록 인공지능에 대체되기 쉬운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육아·간병을 비롯한 돌봄노동은 다른 인공지능 연구에서도 자동화가 어려운 영역으로 꼽히곤 한다. 돌봄노동에서 필수인 공감 능력은 인공지능이 흉내내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갈수록 돌봄노동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관련 직업도 세분화되는 추세이지만 윤석열 정부의 돌봄 정책은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모양새다. 정부가 연내 필리핀 국적 노동자 100명을 가사·육아도우미로 데려온다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내국인과 재외동포(F-4)·결혼이민자(F-6)와 같은 장기체류자, 방문취업동포(H-2)만 취업할 수 있는 가사·육아 돌봄서비스 분야에 비전문취업(E-9) 비자를 추가하기 위한 시범사업의 일환이다. 일-가정 양립 정책에 힘을 싣고 있지 않은 정부가 이를 저출생 대책으로 앞세운 것도 문제지만 그것 말고도 따져볼 대목이 적지 않다.

 

우선 고용허가제의 근간을 이루는 비전문취업 비자는 내국인을 구하지 못한 중소기업에 인력을 공급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정부는 가사·돌봄 인력의 공급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하지만, 이는 절대적 인력의 수가 부족하다기보다 낮은 처우로 인해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문제다. 거슬러 올라가면 가사노동은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대표적 비공식 노동이었다.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될 당시부터 ‘가사사용인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조항(11조 적용범위)이 따라붙었다. ‘허드렛일’이라거나 ‘여성(엄마)의 임무’라는 전근대적 인식 때문이다. 그나마 2021년 가사근로자법 제정으로 노동자성 인정과 처우 개선이 겨우 첫걸음을 뗀 상황인데, 다시 ‘값싼 노동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실제로 고용노동부는 최저임금(시급 9620원)을 적용한다고 했지만, 시범사업에 쓰일 예산(숙소비 등 1억5천만원)을 쥐고 있는 오세훈 서울시장은 공공연하게 ‘더 낮은 임금’을 요구한다. 현재 가사·육아도우미 시급은 1만5천원 안팎으로 형성돼 있다. 오 시장은 지난해 9월 국무회의에서 ‘월 38만~76만원의 싱가포르식 외국인 육아도우미 도입’을 건의하며 논의에 불을 지핀 장본인이기도 하다. 비전문취업 비자가 개방되면 업계의 전반적인 임금 수준 하락을 초래할 소지도 크다. 열악한 일자리가 될수록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오래 일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이는 질 낮은 돌봄서비스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전 정부에서도 검토했다가 중단한 이유는 무엇인지, 왜 가사·육아 분야는 정주 기반 외국 인력에게만 허용해왔는지를 제대로 들여다본 것인지도 의문이다. 앞서 기획재정부는 2016년 경제정책방향으로 ‘외국인 가사도우미 도입’ 여부를 검토했지만 정부 부처 내에서도 저임금으로 인한 불법체류, 인권침해, 내국인 일자리 침해 등에 대한 우려가 나오면서 논의가 중단됐다. 노동 전문가들은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가 과연 개인의 집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김양숙 사회학자)이라고 지적한다. 현행 고용허가제가 사실상 사업장 변경의 자유를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노동자에게는) 월급 100만원만 줘도 자국 임금의 몇배 수준’(오세훈 시장)이라며 낙관하는 것도 섣부르다. 우리는 농촌 일손 부족에 투입된 외국 인력들이 하나둘씩 사업장을 이탈하는 과정을 지켜본 바 있다.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고 잔업·특근으로 수당을 더 챙길 수 있는 제조업에 대한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다. 돌봄노동 시장이 또 다른 불법체류를 양산하는 관문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는 말이다. 육아와 단순 가사가 엄격하게 분리되는 추세인데 언어와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면 필리핀 노동자에게 주로 어떤 업무가 주어질지도 명확하지가 않다. 단순히 ‘외국인 가사도우미’로 퉁치고 시작할 문제가 아니다. ‘필리핀 이모님’들의 불안한 미래가 벌써 떠오르는 건 과도한 우려인가.

 

출처: 한겨레 23.08.23 황보연 논설위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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