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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동자 연쇄 살인 20년, 그 비극을 이제 끝내자 등록일 2024.02.08 13:42
글쓴이 한길 조회 160

죽는 게 나은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사회 노동자들은 삶이 죽음보다 고통스럽다며 자꾸만 현실을 등진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손배가압류다. 인간답게 살자고 소리쳤건만 눈앞에 닥친 수십억 손배가압류가 삶의 근본을 무너뜨렸다. 자본가가 아닌 어떤 이가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가진 것은 없는데 돈에 짓눌려 목숨을 내놔야 하는 이들. 아이러니하게도 이 노동자들은 정부와 사회가 규정한 ‘귀족’들이다.

20년 전 10월17일,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김주익 열사는 유서에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적었다. 노조 활동을 이유로 떨어진 18억원의 손배가압류 집행으로 임금명세서에 찍힌 월급은 고작 13만원. 삶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씩 제거한 한진중공업과 한국 사회는 그에게 단 하나의 선택지만 남겼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눈에 밟혀도, 당시 유행하던 ‘바퀴 달린 운동화’를 사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만 가득 들게 한 세 아이가 어른거려도 그는 그렇게 열사가 됐다. 김주익 열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곽재규 열사는 13일 뒤 크레인 위에서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고 정은임 문화방송(MBC) 아나운서는 새벽 라디오에서 김주익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2003년 늦가을, 대한민국의 노동귀족들이 사는 모습입니다.” 당시 대통령 노무현의 말을 비꼬아 비판한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변한 건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제 ‘노동귀족’을 넘어 일하는 사람을 ‘기득권’, ‘조폭’으로 칭한다. 여당은 아예 “노조가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대표자로 있는 금속노조의 노동자를 두고는 더 날카로운 칼날이 들어온다. 금속노조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였다 하면 경찰은 바로 강제해산한다. 이유 없이 범죄자 취급을 받는 2023년의 가을이다.

김주익·곽재규 열사의 영결식에서 곽재규의 딸 경민은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경민은 아빠에게 쓴 편지를 낭독하며 “아빠는 죽지 않았어. 엄마 가슴에, 우리 가슴에 언제나 숨 쉬고 있어”라고 했다. 그리고 열사의 동료였던 우리에게는 “두 번 다시 아빠와 같은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다시 20년이 흘렀다.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열사의 딸 경민은 이제 성인이 돼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 모든 일터를 나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아름답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부족했다.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일하고, 매일 두 명이 목숨을 잃고 퇴근하지 못한다. 이를 바꿔보자 몸부림쳤지만, 손배가압류 앞에 너무 많은 생명이 스러졌다.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는 78억원 앞에 불태워졌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는 47억원에 병을 얻었다. 서른 명이 넘는 노동자와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하청 노동자들은 470억원에 인생을 압류당했다. 3160억원. 지금까지 노동자들이 쟁의행위를 했다고 받은 손배가압류 금액이다. 정리해고로 일터에서 쫓겨나고,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란 이유로 저임금에 시달리는 이 나라 ‘귀족’들이 사는 이야기다. 갚을 길이 없는 돈 앞에 남성 노동자의 30%가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연구 결과(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 실태조사, 고려대 일반대학원 보건과학과 김승섭 교수 연구팀, 2019년 1월)도 있다. 죽는 게 나은 세상, 누가 만들었나.

손배가압류로 노동자를 죽이지 말라. 파업에 따른 손해 책임은 노동자 개인이 아닌 노동조합에 지우라. 그리고 쟁의행위의 범위를 넓혀 ‘합법 파업’을 보장하라.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가 극한투쟁에 내몰리지 않도록 ‘진짜 사장’과 대화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 이것이 금속노조가 요구하는 노조법 2·3조 개정안이다. 모두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높이는 내용이다. 국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20년 노동자 연쇄 살인의 역사, 이제는 끝내야 한다.


* 노무법인 한길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nguilhrm/223348105006

* 출처: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11268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