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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월급 사장’ 내세워 중대재해 처벌 피하는 ‘진짜 사장’ 등록일 2023.09.18 13:47
글쓴이 한길 조회 195
중대재해처벌법은 실질적 경영책임자에게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 제정됐다. 하지만 실제론 ‘월급쟁이 사장’을 앞세워 진짜 사장이 중대재해에 대한 책임과 처벌을 피해 가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대표이사 면책’을 위해 안전보건임원(CSO)을 내세우려던 기업들이 ‘시에스오는 대표이사의 안전보건 관리 책임을 대신할 수 없다’는 고용노동부의 제동에 복수의 대표이사를 세우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꾸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3월 한국제강의 사내하청 노동자가 작업장 설비 보수 도중 크레인에서 떨어진 1.2t 무게 방열판에 깔려 숨졌다. 한국제강은 중량물 취급에 대한 작업계획서도 없이 낡고 해진 섬유벨트를 계속 작업에 쓰도록 했다.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저버린 한국제강의 대표이사 성아무개씨는 지난 4월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지난해 1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뒤 원청 대표가 실형을 선고받은 첫 사례였다.

하지만 30일 한겨레 취재 결과 ‘창업자 2세’이자 한국제강의 또 다른 대표이사 하아무개씨는 형사처벌을 피한 것으로 확인됐다. 복수의 각자 대표이사 체제인 한국제강의 지난해 감사보고서를 보면, 이 회사는 하 대표를 비롯한 하씨 일가가 지분 77.14%를 소유해 실질 지배하고 있다. 진짜 사장은 법망을 피해 가고 월급 사장이 ‘방패막이’가 된 셈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을 대표하고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경영책임자 등)에게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를 부여한다. 고용부는 시행령 설명자료에서 “직위의 형식적 명칭에 구애되는 것이 아니라 사업 운영에 대한 실질적 권한과 책임이 부여된 사람”을 경영책임자로 본다고 밝혔다. 대검찰청의 중대재해처벌법 벌칙해설서도 “복수의 대표이사가 있는 경우 회사 내에서 직무, 책임과 권한 및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실질적으로 최종 경영책임자가 누구인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실무에서 이런 법 취지는 종종 무시된다. 지난해 3월 비정규직 노동자가 크레인 안전벨트에 몸이 감겨 숨진 동국제강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고용부는 2019년 취임한 이 회사 월급 사장 김아무개씨를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또 다른 대표이사 장아무개씨는 동국제강의 두번째 대주주이자 부회장이며 이사회 의장도 겸하는 실권자였지만 입건되지 않았다. 유족은 ‘진짜 사장’ 장씨를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상태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때부터 기업들은 ‘대표이사 면책’을 위해 시에스오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하지만 ‘안전보건임원이 안전최고책임자’라는 기업의 주장에도 고용부가 ‘시에스오는 대표이사를 대신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하자, 기업들은 아예 각자 대표이사를 세워 형식상 안전보건 업무를 전담시키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고 있는 중이다. 회사 입장에선 총수인 시이오(CEO)가 기소되는 것보다 더 큰 리스크는 없기 때문이다. 대형 로펌에서 노동 사건을 맡는 한 변호사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1인 대표 체제였던 중견기업들이 리스크 관리를 위해 각자 대표이사를 세우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진짜 사장을 법망에서 빠트리는 것은 법 취지에 대한 망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중대재해전문가넷 공동대표인 권영국 변호사는 “중대재해처벌법 취지는 ‘사업의 최종적 책임자가 안전을 책임지라는 것’이기 때문에 안전 업무를 누구에게 어떻게 위임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안전보건 확보에는 상당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기에 실질적 경영책임자를 대신해 월급 사장이 안전을 책임지기는 불가능한 구조”라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