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정권찬을 징역 6개월에 처합니다.”
순간, 판사의 선고 내용을 적으려 했던 내 손에서 힘이 빠졌다. ‘잘못 들었나?’ 하는 의아한 눈으로 판사를 쳐다봤다. 얼굴을 하얀색 마스크로 가린 판사는 물었다. “정권찬씨, 하실 말씀 있으세요?”
대리점주가 일방적으로 파기했던 합의를 이행하라던 투쟁 과정에서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받은 판결이었다. 검사의 벌금 구형에도 판사는 실형을, 그것도 법정구속하는 마당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그렇게 나의 2022년 12월8일 오전 10시는, 전주지법 군산지원 형사법정에서 박제됐다.
두 손은 차가운 은빛 수갑으로 채워지고 포승줄로 몸이 꽁꽁 묶인 채 호송차에 탑승했다. 자꾸 터져 나오는 한숨과 함께 호송차는 매정하게 출발했고, 창밖으로 보이는 내가 태어나고 자라 익숙했던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서럽고 서러운 비정규 노동의 참담한 현실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갔다.
얇은 하얀 고무신 때문인지 발 딛는 군산교도소 바닥은 내장이 오싹할 만큼 진저리치게 한기가 돌았다. 손톱으로 양철판을 긁는 것 같은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잠금장치가 잠기자 비로소 내 몸이 갇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법정구속으로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놀랄 일은 안 봐도 알 정도지만, 현대자동차를 판매하는 영업사원으로서 당일 오후 차량을 인도해줘야 할 고객 생각에 정신이 아득했다. 딱 봐도 오래된 ‘수용자 안내문’ 포스터를 보고 호출벨을 눌러 교도관에게 전화 한 통화를 간곡히 부탁했다. 규정을 확인한 교도관은 잠시 후 나를 구불구불한 긴 복도 어딘가로 데려가 전화 박스 앞에 데려다줬다. 호흡을 가다듬고 아내에게 전화했다. 아내는 교도소 쪽으로부터 이미 소식을 전달받았지만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차오르는 울음을 참기 힘들어했다. 나까지 울어버리면 얼마 허락되지 않은 통화시간을 허비할 것 같아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목젖이 매운 상태로 겨우 말했다.
“여보, 울지 말고 오늘 인도해야 할 고객등록 서류가 법원 주차장 차 안 가방에 있는데, 정규 형님에게 대신 부탁 좀 한다고 전해줘.”
아내는 알았다면서 계속 “괜찮아?” “괜찮아?”라고 일렁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통화가 끝나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는 복도를 걷는 내내 울음을 참으려 꽉 다문 입 때문에 턱이 아플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의지와 상관없이 눈꼬리 아래로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타고 내렸다. 다시 방안에 갇히자 그동안의 시간이 머릿속을 채워갔다.
내가 현대자동차를 판매하기 시작한 때는 2005년께 여름이었다. 방송통신대를 입학하고 딱 한학기를 마친 상태에서 학업과 직업을 병행하고픈 간절함이 있던 터에, 마침 생활정보지 구인광고를 보고 ‘영업은 병행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자동차전시장을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의 비정규직 노동은 시작됐다. 노동자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는 현실조차 모를 만큼 전에 다녔던 직장도 근로조건이 원시적이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내가 겪은 세상은 온통 비정규직 천지였고, 정규직이란 것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이렇다 할 학연도, 지연도, 인맥도 없던 나는 차를 팔지 못하면 수입이 ‘0’원이라 현장을 처절하게 개척해야 했다. 판촉비 한푼이라도 아끼려 새 사양이 나오면 캐비넷에 쌓아뒀던 구형 사양의 카탈로그를 들고 아파트 가가호호 훑기, 빌딩타기, 상가훑기를 했다. 하지만 나와 동료 판매노동자들은 현대자동차와 대리점주들의 방조 아래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오징어게임과 똑 닮은 혈투장의 주인공이 되어 갔다.
대리점주들은 누가 차를 팔든 꼬박꼬박 대당 무려 30%의 수수료를 떼갔다. 우리는 거기에 또 3.3% 세금을 공제한 후 몫을 분배받는다. 이 금액으로 선팅 등 이러저러한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한다. 통신비, 차량유지비 등 영업에 꼭 필요한 비용은 고사하고 점심마저 내 돈으로 해결하고 나면 손에 쥔 건 서러운 눈물뿐이다. 조선 말기 농민들의 소작료율이 생산물의 약 33%였다고 한다. 당시 소작농들 처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셈이다.
반면 대리점주는 자신이 판매한 차는 수수료 100%를 챙긴다. 거기에 현대자동차와 현대캐피탈에서 지급하는 인센티브를 추가로 확보한다. 현대자동차의 ‘대리점 경영 지침서’에 따르면, 인센티브란 ‘전체’ 판매실적에 따라 “판매 수수료(기본 수수료) 외에 대리점 운영, 판매 증대, 직원 판매동기 부여 강화를 위해 지원되는 지원금”을 통칭한다. 나를 형사고소한 대리점주도 인센티브가 대리점 ‘전체’ 실적을 기준으로 책정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대리점주들은 일반적인 사업주와 다른 특색이 있다. 이들은 생산설비 투자·유지, 연구개발, 재고관리 등의 위험 부담이 없다. 대부분은 현대자동차 영역이고, 오직 판매노동자 즉 ‘사람’만이 자신의 사업자산이다. 따라서 대리점 ‘모든 사람’이 판매한 전체 실적에 따라 지급되는 인센티브는, 판매한 ‘모든 사람’들과 분배해야 합당하다. 실제로 그렇게 분배하는 대리점주들이 있었고, 인센티브를 분배하지 않거나 사용처가 불분명한 곳에서 노조 가입자가 증가했다. 그러나 일부 대리점주들은 단체교섭에서 점심 식대를 요구하는 노동조합에 지급 의무가 없다거나 편의점 ‘컵밥’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라틴어로 ‘빵을 함께 먹는 사람들’을 콤파니아라고 불렀고 그게 현재 ‘Company(회사)’의 어원이라는데, 이들에게는 ‘사람’, 그러니까 노동인권이 없다.
이 모든 게 나와 대리점주 사이 문제이고 국가는 비정규 노동에 아무런 역할이나 책임이 없다는 것인가?
나는 대리점주로부터 형사고소와 그로 인한 구속, 해고통지, 가처분, 가압류, 손해배상소송을 당했다. 그러다 보니 경찰, 검찰, 노동청, 노동위원회, 법원 등 여러 국가기관을 경험해 봤다. 심지어 생존권을 위해 투쟁한 나를 ‘강력방’에 배정한 교정기관까지도. 국가는 노동자에겐 엄격했지만 사용자에겐 무척 관대했다.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에서 있었던 일이다. 심문회의 최종진술을 하는데 의장이 웃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다. 격분한 내가 “왜 웃습니까!”라고 소리치니 의장이 한다는 소리가 “이 상황이 참 안타까워서 그랬습니다”라고 했다.
그런 비웃음보다 힘들었던 건 바로 ‘입증책임’이다. 노동위는 준사법기관의 하나이고 특이하게도 우리나라는 입증책임을 노동자에게 요구한다. 노동자가 ‘저 사용자는 분명 나쁜 놈일 거야’ 생각하고 취업과 동시에 꼼꼼하고 부지런히 증거를 모은다면 모를까, 대부분의 노동자는 입증책임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 설사 그렇게 증거를 모은다 해도 노동자가 모은 증거 대부분이 법률가로 구성된 공익위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은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노동위를 찾은 노동자들을 더 절망하게 한다. 꽤 탄탄한 증거가 제출된 사건에서도 부당노동행위 등으로 인정되는 비율은 매우 낮다. 어쩌면 노동위가 진실을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나는 구속되면서 즉시 항소했기 때문에 징역형이 확정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리점주는 내가 징역형을 선고 받아 업무를 할 수 없어서 해고했다며 항소 이후 해고통지를 했다. 중노위 판정 당시 나는 1심이 파기되고, 벌금형이 선고된 상태라 대리점주의 주장에 큰 모순이 있었다. 당연히 나는 이 부분을 탄핵했다. 그런데 중노위는 이에 대한 판단 없이 기각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