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최영준 |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1. 얼마 전 강남 아파트에서 경비 일을 하셨던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순종적이고 말 없는 사람만 생존해요.’ 씁쓸하게 말씀하셨다. 한명이 책임지는 경비의 범위는 계속 더 넓어지고 있지만, 월급의 증가는 미미하다. 그런데도 경비를 하려는 사람들은 줄을 서 있다. 그러니 더 안전한 휴게시설이나 퇴직금 등을 요구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이곳저곳 몸이 아프게 되면서 일을 그만두셨다. 이분은 저임금 노동시장에서 볼 수 있는 노동자의 매우 전형적인 모습이다. 연구를 위해서 만났던 택배노동자 혹은 프리랜서들에게 노동시장은 유연을 넘어 한없이 액체화된 공간이었다.
#2. 인공지능의 물결이 거세다. 어떤 일자리와 직무가 대체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연구들이 제시되고 있다. 낮은 숙련도를 요구하는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가설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주장은 힘을 잃었다. 대단한 숙련이 필요하지 않지만, 기계나 인공지능이 대체하지 못하는 일자리도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매일 얼마나 반복적인 업무를 하고 있는지가 인공지능에 취약한 일자리라는 가설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생각건대 반복적 일상성이 높은 직업도 미래에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 힘이 있는 집단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협상력은 저항을 가능하게 한다.
#3. 노동시장 유연성은 변화하는 사회경제 구조에 조응하여 노동시장이 변화할 수 있는 정도를 일컫는다. 어제까지는 비가 오면 모두가 우산을 들었지만, 오늘부터는 사람들이 우비를 입기 시작했다면 이에 맞추어 산업, 기술, 그리고 노동 인력이 발 빠르게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경제적 효율성은 높아지고 시민들의 욕구와 수요가 맞추어진다. 그러니 일부 언론과 학자들이 노동시장 유연화가 더욱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유연성은 고용주 관점에서 계약의 유연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역시 고용주의 협상력이 노동자의 협상력에 비해 높기 때문이다.
#4. 인구의 고령화가 가파르다. 수요는 빠르게 증가하는데 의사의 공급은 적다. 전국에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서 사망하는 이들이 10만명당 40명이 넘고, 일부 지역에서는 50명이 넘는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공급이 희소한 의사의 협상력은 극대화된다. 몸은 고될 수 있지만 경제적 이익은 크다. 인공지능이 어떤 일자리도 삼켜버릴 것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이렇게 부와 안정성이 보증된 직업은 드물다. 그러니 초등학생을 ‘의대반’에 보내서 고등학교 수학을 하게 하는 것이 의사가 되는 일상적인 경로가 되어간다. 이미 과학자와 창업가는 의사 한참 뒤에 서 있다. 의사가 부유한 집안에 능력이 출중한 이들만의 직업이 되어갈수록 직업은 본질에서 멀어진다. 또한 경제적 효율성도, 시민의 욕구와 수요도, 국민의 행복도 채워지지 못하고 있다.
#5. 의대 증원에 대해 전공의들의 반발이 거세다. 의료 현장을 떠나고 있다. 당장 많은 이들의 생명과 건강이 위협을 받고 있다. 이미 의료 공급 부족으로 생명을 잃거나 신체 일부를 포기해야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전공의들이 진료를 거부하니 국민들의 근심이 깊다. 이쯤 되면 의사뿐 아니라 의사를 설득하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 서서히 등장하고, 양비론은 심화될 것이다. 난 양비론자가 되고 싶지 않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의대 정원 확대를 주장하는 보건복지부와 학자들의 주장이 타당하다. 과거의 실기를 다시 할 수 없다. 노동시장 유연성이 필요한 영역은 그 어느 곳보다 의료계다.
#6. 의료계 밖에서도 노동시장 유연화는 정책 난제다. 그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 더욱 높다. 사회경제적 변화의 속도가 빠른데 어찌 노동시장 제도와 구조는 변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현실에서 유연화는 합리성만을 가지고 진행되기보다 협상력을 가진 이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합리성을 가진다고 해도 유연화 과정에 노출된 이들은 실업과 소득 상실로 삶의 의미와 터전을 잃을 수 있다. 민주적이고 상생하는 유연성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동등한 협상력, 유연화 속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사회 투자, 그리고 삶의 불안을 상쇄할 수 있는 두터운 소득 보장이 동반되어야 한다. 유연화를 제대로 다시 쓰기 위해서 튼튼한 복지국가가 필수인 이유다.
*출처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