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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험 방치한 건 회사인데…살아남은 노동자가 산재 공범이 됐다 등록일 2023.08.31 11:27
글쓴이 한길 조회 148

지난해 5월 굴착기 기사 ㄱ씨는 공사 현장에 투입됐다가, 동료 노동자의 사망에 연루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여러 작업이 동시다발로 진행되던 좁은 공사장에서 한 하청 노동자가 ㄱ씨 굴착기와 담장 사이에 끼여 숨졌기 때문이다. 굴착기 작업반경 내에 90㎝ 너비 좁은 통행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굴착기가 회전할 경우 너비가 5㎝까지 좁아지는 구조였지만, 충돌 위험을 관리할 ‘건설기계 유도자’는 없었다. 현장소장은 작업계획서와 달리 출입 통제 없이 작업하게 했다.

구조적으로 위험한 현장에서 일해야 했던 ㄱ씨는 경영책임자·안전보건관리자와 함께 피고인이 됐다. 검찰은 공소장에 “ㄱ씨에게는 건설기계 유도자가 배치되지 않은 경우 작업을 중단하고 공사 관계자에게 배치를 요구하는 등 굴착기 작업으로 인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업무상 주의의무가 있었다”고 밝혔다. 잠재된 위험을 스스로 인지해 주의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산업재해는 종종 구조적인 이유로 발생한다. 사업주가 노동자 안전을 위한 시설물을 설치하지 않는다거나, 안전관리·감독·교육 의무를 소홀히 한 게 원인이 되곤 한다. 이 때문에 사업주의 의무 이행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현장 노동자는 산재의 형사책임에서 면책될 수 있도록 수사와 재판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ㄴ씨도 동료의 산재사고 때문에 재판에 넘겨졌다. 2021년 2월 현대중공업 울산공장에서 현장 노동자 강아무개씨가 크레인에서 떨어진 2.3톤 철판을 머리에 맞아 숨졌다. 현장에는 철판 추락을 막는 안전장치나 작업 지휘자는 물론이고 안전대책이 포함된 작업계획서조차 없었다. 심지어 이런 사고가 처음도 아니었지만, 회사는 기존의 위험한 작업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법원은 해당 사업부 대표와 안전관리책임자 등을 처벌하면서, 레버를 잘못 풀어 결과적으로 철판을 떨어뜨린 현장 노동자 ㄴ씨에게도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판결문은 “ㄴ씨를 비롯한 작업자들은 표준화된 작업방법 없이 전임자로부터 구전된 비일률적 방법으로 작업하고 있었”으며 “ㄴ씨는 경력 1년이 채 안 된 작업자로 경험이 부족한데다 작업을 지휘할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작업 현장이 구조적으로 위험했고 ㄴ씨가 작업 위험성에 대해 교육받지 못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형사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안전교육도 받지 못한 채 산재 ‘가해자’가 될 위험에 방치돼 있다. 지난해 2월 경북의 한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가 프레스기계에서 날아온 플라스틱 공구에 이마를 맞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한달 뒤 숨졌다. 이 사고로 원·하청 대표가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됐는데, 피해자로부터 열 걸음 정도 거리에서 일했던 베트남 국적의 미숙련 현장 노동자 ㄷ씨도 피고인 명단에 올랐다.

ㄷ씨는 프레스기계의 임시 담당자였다. 180도의 열과 200톤의 압력이 가해지는 위험한 기계라 숙련 노동자가 다뤄야 했지만, 사람이 없어 ‘일주일만 맡으라’던 게 한달째였다. 기계 안에 맨손으로 부품 재료를 넣는 일은 여간 뜨겁고 아픈 게 아니었다. ㄷ씨는 요령껏 작은 공구를 사용해 일했고, 회사도 이런 사정을 잘 알았지만 아무 조처도 하지 않았다. 결국 사고 당일 ㄷ씨가 사용하던 ‘작은 공구’가 튕겨 나가면서 7m 거리에 있던 동료의 목숨을 앗아갔다. 안전관리 조직도 체계도 없는 회사에서 한국어 소통이 안 되는 ㄷ씨는 제대로 된 안전교육도 받지 못했는데,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ㄷ씨는 어쩌면 그 공구를 맞고 산재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운 좋게 살아남아 ‘공범’이 된 셈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전문가들은 산재 사건에서 현장 노동자의 업무상 과실치사죄가 성립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사업주의 안전 교육·관리·감독 의무 이행이 선행되어야만 비로소 노동자의 구체적인 주의의무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주가 모든 의무를 이행했음에도 노동자가 이를 어겨 중대재해가 발생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형사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보통 산재는 ‘원래 하던 대로’ 일하다 벌어진다. 노동자는 만들어진 시스템에 들어가서 일할 뿐, 일하는 방식을 결정할 수 없다. 따라서 산재 사건에서 동료 노동자의 업무상 과실치사는 범죄 성립이 안 된다”며 “기업이 만든 시스템 속에서 위험하게 일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외면하고 현장 노동자를 처벌하는 것은 산재 책임을 개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다혜 금속노조법률원 변호사도 “산재는 위험한 일터의 구조적 원인으로 발생하는데, 사고 직전 마지막 행위자일 뿐인 현장 노동자를 기계적으로 기소하고 처벌하는 관행이 계속되고 있다”며 “사업장의 안전보건관리 책임이 사업주에게 있다는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출처: 한겨레신문 2023년 7월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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