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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기력한 차별시정명령, 직장내 성폭력 피해자 5년째 ‘고립’ 등록일 2024.06.07 09:19
글쓴이 한길 조회 1013
모태 불자인 윤소연(가명)씨는 종교계 성폭력 문제를 폭로했다. 그는 2016년 불교재단법인 선학원에서 수습으로 일하다 당시 이사장이던 법진스님에게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 가해자는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받았다. 그렇다면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갔을까.

윤씨를 기다린 건 ‘보복’이었다. 사측은 분리조치란 명분으로 그를 고립시켰다. 단순업무를 맡기고 혼자 근무하게 했다. 노동위원회는 물론 최근 법원도 이를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차별적 처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다. 차별시정명령을 강제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사측이 대법원까지 간다면 꼼짝없이 수년을 또 기다려야 한다. 차별적 처우는 이미 5년째 시정되지 않고 있다.

수습 한 달 만에 성폭력 피해
조사 없이 피해자 내쫓으려던 재단

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재판장 송각엽 부장판사)는 선학원이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상대로 낸 차별시정 재심판정 취소소송에서 최근 원고 청구를 기각했다.

윤씨는 2016년 3월 재단 사무국 직원으로 입사했다. 수습으로 일한 지 한 달 무렵, 이사장의 성추행이 시작됐다. 5개월가량 세 차례 가해가 있었다. 윤씨는 이로 인해 불안·우울장애 등 진단을 받게 됐다. 윤씨는 같은해 10월 재단에 “(사건을) 논의해 조치해 달라”고 요구하고, 피해로 인해 출근을 못 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이사장을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그런데 이사장의 추행보다 윤씨의 결근이 문제가 됐다. 재단은 윤씨의 피해 호소 이후 조사하지 않았다. 대신 윤씨가 무단결근했다며 이듬해 9월 4대 보험 피보험자격 상실신고를 했다. 직장내 성폭력 사건을 외면하던 사측은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 위반으로 결국 제재를 받았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은 재단이 직장내 성폭력 조사를 시작조차 안 했다며 과태료 400만원을 부과했다. 재단과 이사장은 이러한 미조치 및 직장내 성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대해 윤씨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법원 판결도 확정받았다. 윤씨가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고, 중앙노동위원회가 고용관계가 유지됐단 이유로 각하 판정하면서 재단은 4대 보험 피보험자격 상실신고를 취소했다.

성추행 가해자인 이사장은 2019년 1월 대법원에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확정받았다. 그러나 재단 이사회는 이사장의 사직서를 반려했다. 2008년부터 이사장직을 세 차례 연임한 법진스님은 2022년 5월에야 최종 사임했다.

일상회복 돕는 대신 따돌리기?

윤씨는 2019년 4월 다시 출근했다. 재단은 일상회복을 돕는 대신 괴롭힘에 나섰다.

재단은 그를 사무국으로 원직 복귀시키지 않고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방문객 응대, 관리 및 청소 업무 등을 담당하는 자리로 배치했다. 혼자 근무하도록 했고, 사무국 사무실 출입을 제한했다. 업무용 컴퓨터를 제공하지 않고, 사내 전산망 시스템 접근권한도 부여하지 않았다. 윤씨가 “따돌림을 중단하라”며 원직 복귀를 요청하자, 재단은 가해자와 분리조치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사장 집무실이 사무국 안에 있다는 이유였다.

윤씨는 직장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불리한 처우로서 차별적 처우에 해당한다며 2021년 2월 노동위원회에 차별시정을 신청했다. 형사고소도 진행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와 중노위는 윤씨측 손을 들어줬다. 재단과 이사장은 형사재판에서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혐의로 각 벌금 200만원도 확정받았다. 윤씨는 여러 차례 원직 복직 등을 요청했으나 재단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지노위·중노위 “성폭력 피해자 차별”
법원 “부당하게 고립시킨 행위”

노동위 판정에 이어진 행정소송에서 법원도 차별이라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윤씨의 재출근으로 근로관계가 새롭게 형성됐기 때문에 원직 복귀시킬 의무가 없다는 재단측 주장부터 기각했다. 재판부는 “윤씨가 출근하지 않은 건 별다른 사유가 없는 무단결근이 아니라 직장내 성희롱이 있었고 이에 대한 시정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윤씨는 퇴직 의사를 밝힌 적 없고 오히려 복직을 전제로 적절한 조치가 이뤄질 것을 계속 요청했다”고 지적했다. 근로관계가 적법하게 종료됐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윤씨의 업무를 바꾼 것은 정당한 인사권 행사며 업무상 필요성이 있었다는 재단측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사무직으로 복직을 원한 윤씨의 의사에 명백하게 반하는 것”이라며 “윤씨가 복직해 다시 사무국 직원으로 근무해도 잉여 인력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어 “문화기념관이 개관한 이래 윤씨를 배치하기 전까지 상주 직원을 전혀 두지 않았다”며 “종전처럼 사무국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관리업무를 수행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윤씨가 유물·자료 등 관리업무 전문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해당 업무를 부여받지도 않았고 단순 업무만을 부여받았다”고 덧붙였다.

분리조치 주장과 관련 재판부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근무장소를 그 의사에 반해 변경했다”며 “가해자가 다른 장소에서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고 짚었다. 특히 이사장이 사임한 뒤에도 윤씨의 근무장소 변경 요청을 수용하지 않은 점도 언급됐다.

사무국 출입권한 및 사내 전산망 접근권한 제한 등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유독 윤씨만을 사내에서 부당하게 고립시키는 행위임이 분명하다”고 판시했다.

차별시정명령 이행강제 어려워
확정판결까지 고통 견뎌야 하는 피해자

변한 건 없다. 윤씨는 여전히 문화기념관에서 일하고 있다. 부당해고 등에 대한 구제명령과 달리 차별시정명령은 노동위원회 판정만으로 강제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노동위원회는 부당해고 등에 대한 구제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사용자에게 3천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한다. 구제명령이 이행될 때까지 매년 2회씩 최대 2년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다. 또 노동위원회 고발로 확정된 구제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사용자는 1년 이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반면 차별시정명령은 확정된 시정명령 불이행에 대해서만 1억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한다. 사용자가 행정소송을 제기하고 대법원까지 간다면 법원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피해자는 차별을 견뎌야 한다는 뜻이다.

윤씨를 대리한 김두나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는 “차별시정제도는 이행 강제 수단이 없어 행정소송으로 다투게 되면 소송이 끝날 때까지 불리한 처우가 시정되지 않은 상태가 계속된다”며 “사용자가 차별적 처우를 했다는 형사 판결을 받았지만 처벌할 뿐 시정을 강제하지 않는다.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