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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급자가 거부하라는 서울시 매뉴얼, 그 자체가 2차 가해” 등록일 2023.04.18 11:28
글쓴이 한길 조회 187

위력에 대한 이해 없는 매뉴얼

사급자 사적 노무금지가 맞아

권력자 심기기분으로 평가받는

감정돌봄노동, 선 넘는 주춧돌

 

조력자들과 피해자로서 분투

비슷한 위력 성범죄에 놓였다면

나를 사랑하고, 나를 믿고 지켜

절대 자책의 늪에 빠지지 않길

 

박원순 성폭력 피해자 김잔디씨

위력 성범죄의 위력은 가해자의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이 알려지자 그의 측근들과 지지자들은 미투가 아니라는 증거라며 피해자가 업무상 쓴 손편지를 공개했고, 실명과 소속을 인터넷에 퍼 날랐다. ‘기획 미투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박 전 시장 사건의 피해자는 지난달 20일 책<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천년의상상)를 펴냈다. ‘피해호소인이라는 빗나간 호명을 넘어 피해자라는 당연한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 분투했던 지난1년 반의 시간을 담았다.

지난 3일 서울 서초동 법부법인 온세상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한 김잔디(가명)씨는 여전히 피해를 의심하는 이들을 어떻게 보는지 묻자 진실의 영역과 믿음의 영역은 따로 있다고 했다.

믿음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내가 괴로워하는 것이나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것이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저를 아프게 한다면, 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제 권리를 보호하려고 노력할 거예요.“

20207월 박 전 시장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 이어진 애도의 물결은 거대한 2차 가해의 파도가 되어 김씨를 덮쳤다. 고소 사실유출에 이은 박 전 시장의 극단적 선택으로 인해 수사기관에서 사건의 실체를 밝힐 기회는 사라졌고, 김잔디씨가 끝없는 2차 가해에 노출되는 시작점이 됐다. 여성운동가 출신 일부 정치인은 그를 피해호소인이라 부르자고 했다. 김잔디씨는 나는 페미니즘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분들의 페미니즘은 그들의 진영, 주변에 일어난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이 사건을 통해 여성운동이 치열하게 싸우고, 자기 정화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동시에 김잔디씨 곁에는 목숨을 걸고, 지난 인생을 다 걸고조력에 나선 여성단체 활동가들과 변호인들이 있었다. 이 가운데 한명이자 베테랑 여성운동가인 이미경 전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김씨에게 여성운동이 10년을 후퇴한다고 해도 잔디씨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누군가 생명을 잃어야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긍성을 보여주는 사회, ‘피해자의 죽음을 반성과 성찰의 계기로 삼는 사회의 잔인함에 굴하지 않게한 격려였다고 말했다.

사적 노무‘2차 가해와 더불어 박원순 전 시장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이라는 두 위력 성범죄를 아우르는 열쇳말이다. 유력 정치인을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는 여성직원은 두 권력자의 심기와 기분으로 자신의 성과를 평가받아야 한다. 4년간 서울시장 비서로 근무한 김잔디씨는 박 전 시장의 약을 대리 처방받고, 샤워 전후 속옷을 관리하고, 혈압을 재고, 명절 장보기까지 해야 했다.

김잔디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돌봄감정노동이 박 전 시장이 을 넘는 행동을 하는 데 주춧돌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약 먹는 걸 싫어하는 분에게 약을 먹이는 걸 과업으로 하다 보니, 그분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도 업무가 되었어요. 업무니까 살갑게 굴면서 약을 드시도록 부탁을 하고, 그분이 약을 드시면 제가 감사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어요. ‘약을 먹으면 무슨 소원을 들어줄 거냐는 식의 말이 나오고, 그게 선을 넘는 상황으로 이어졌어요. 이 사람이 좋아서 하는 행위가 아니라 업무에서 파생되는 일이었는데요.”

서울시는 지난해 4월 국각인권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사적 연락, 옷매무새 다듬어주기 등을 금지한 비서 업무 매뉴얼을 마련했지만, 김잔디씨는 위력에 대한 이해가 없는 매뉴얼이라고 했다. 매뉴얼이 사급자가 아닌 하급자인 비서의 특정 행동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짜였기 때문이다. 김씨는 상급자에게 사적 노무를 시키지 말라는 의무를 부여해야 맞지, 비서에게 사적 노무를 거부하라고 하는 매뉴얼이라고 생각한다그 매뉴얼 자체가 내가 거부하지 않아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 같은 자책을 하게 했다. 또 다른 2차 가해라고 비판했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수개월을 제주에서 보낸 김잔디씨는 지난해 서울시청에 복귀해 업무를 시작했다. 그사이 30년 동안 써오던 이름을 바꾸고, 성형수술도 했다. “무서워서 숨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괴롭힐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얼굴과 실명을 밝히라는 2차 가해자들의 요구는 계속되고 있다.

김잔디씨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위력 성범죄 피해자들이 내가 왜 그때 그런 행동을 했지’ ‘왜 그때 상대방에게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지하는 에 빠지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내가 신호등을 못 봐서 사고를 당했다거나 내가 까만옷을 입어서 사고를 당했다라고 해명하고 다니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성폭력 사건에 연루되면 이상하게 피해자가 설명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요. 그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게 자기 자신이에요. 자신을 사랑하고, 어떤 결단을 내렸으면 그 결정을 믿고 나아가는 게 본인의 회복, 극복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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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 한겨레신문